"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김근태와 김근태 친구들은 미래를 기다린 적이 없었다. 우린 언제나 그 시대의 미래이길 자처했었다.

꽃을 가진 사람은 꽃으로, 삽을 가진 사람은 삽으로, 붓을 가진 사람은 붓으로, 모두들 민주주의와 평화·개혁·사회 진보의 한길로 하나되길 희망했었다. “한 개의 촛불로 많은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 촛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는 탈무드의 구절처럼 우리는 희망과 용기를 나누었다.

참여정부의 성공과 한국 정치와 사회 개혁을 위한 담론과 정보, 토론을 나누며 뛰고 또 뛰었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개혁 과제에 대한 치열한 담론과 정견을 발표해왔으며, 건강하고 합리적인 비판자, 조력자임을 자처했었다. 선진적인 정책정당, 전국정당을 위해 열린우리당의 각종 활동에도 성실하게 참여했었다. 긴급한 시국 상황이나 사회부조리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사안에 따라선 시국집회도 주최했었다.

일방적 한미 FTA 반대, 이라크 파병 반대, 삼성 X파일 진상규명과 삼성특검 촉구 등 우리는 우리가 세웠던 정부에 대한 비판도 주저하지 않았다.

끝내 극악한 고문 후유증의 몹쓸 병마를 이기지 못한 김근태, 이루지 못한 꿈을 내려둔 채 우리 곁을 떠나갔다.

성찰하고 반성할 줄 아는 인격과 품성, 표리일체하고 지행합일의 실천, 균형적이고 합리적인 진보주의자, 숲과 나무를 함께 볼 수 있는 사람, 이타와 이기를 동시에 생각하는 사람, 자기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사람, 김근태.

ㅡ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겨울공화국 70년대와 전두환·노태우 군부독재정권의 80년대를 관통하는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우리는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사회 민주화와 진보적 정치 권력을 세우고자 했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담지한 새로운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리더십을 세우고자 했었다.

그가 떠난 후, 누구도 그의 리더십을 닮지도, 능가하지도 못했다. 김근태 의장이 있었다면, 이 분열과 광신의 패권 정치가 아닌 진정한 민주·진보와 통합의 리더십을 세울 수 있었을 것, 회한은 가슴을 저미고 미련은 뇌리를 맴돈다.

ㅡ

그가 민주·진보권력을 세워내고자 마지막 사력을 다하던 시기, 세상은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외유내강의 리더십 보단 '강한 외적 카리스마'의 리더십 만을 갈망했었다. 카리스마(charisma)에 대한 이해가 부박했기에 빚어진 비극이다.

카리스마의 어원은 '신의 은총'이란 뜻의 그리스어다. 지금의 의미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특별한 능력이나 자질'이다. 카리스마 지도자는 순전히 개인적 매력으로 기존의 규칙과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이들을 말한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카리스마란 "어느 특정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되게 하는 특징으로서 초자연적인, 초인간적인 또는 비상한 힘과 능력을 가졌다고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베버는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들을 "개인적 모범의 힘에 의해 규범체제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영웅"이라 설명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정치 컨설턴트 딕 모리스는 "카리스마란 현실 속에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치인의 오랜 노력과 좋은 이슈의 결실로서 오직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정치에서 가장 난해한 요소"라고 말한다.

미국 시카고대 마빈 조니스 교수는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카리스마를 보이려는 지도자는 추종자들에게 자기가 그들의 대망을 구현시켜줄 것이며, 그들의 깊은 열망을 이해하고 있고 그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헌신할 것임을 확신시켜야 한다는 것.

ㅡ

김근태의 카리스마는 기존 정치인의 공식과 현상과는 완연히 달랐다. 김근태야말로 진정한 외유내강형의 카리스마다. 헌신적이고 양심적인 불굴의 용기와 신념을 지닌 카리스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팀에 의해 26일간의 고문에서 살아남은 것도 신기한데, 그는 단 한사람의 이름도 대지 않았고 자신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고문·조작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김근태가 죽음을 넘어 승리를 전취한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뉘라서 그 한달 간의 극단적 고문을 견딜 수 있을까. 과연 어느 누가 죽음을 넘나드는 그 순간에도 승리와 희망을 예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상당 시간이 흐른 후 고문사건의 주범으로 구속된 이근안을 찾아가 목사가 되어있던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화해했다. 그러나 이근안은 석방되자마자 목회자 신분을 내던지고 자신의 고문 만행을 부정하며 극우적 언행으로 되돌아갔지만, 김근태는 그런 용서와 화해, 포용의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었다.

ㅡ

대통령학의 대가 데이비드 거겐(David Gergen)은 저서 권력의 목격자(Eyewitness to Power)에서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기 위한 일곱가지 조건'을 적시한다.

1) 지도자는 부단한 자기관리를 통해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한다.

2) 국가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

3) 전체 대중이나 지지자들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4) 대통령이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힘과 함께

국민, 의회, 언론과 협력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5) 대통령 성공여부는 집권 후 반년 안에

판가름난다. 취임 즉시 자신의 정책을

추진해낼 수 있어야 하고 탄탄한 지지기반,

의회내 지지기반 구축해야 한다.

6) 강인하고 신중한 참모를 등용할 수 있어야 한다.

7) 위대한 지도자는 사후에도 살아남는 유산을

남겨야 한다. 그리하여 다음 지도자도

그 유산을 완수하게 만드는 힘 발휘해야 한다.

그런 리더십이 김근태였다.

ㅡ

전두환 군부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 시기에 함께 했던 시간을 제외하고, 나는 근 8년간 김근태와 함께 정치활동을 했지만, 내겐 그와 함께 찍은 사진조차 없다. 어쩌다 우연히 찍힌 사진은 있지만. 그의 곁엔 내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바랐고 그의 곁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들이 서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허나 내게 남은 사진 중 가장 가슴 아린 사진은 김근태 장례위원으로 김학민 선배와 함께 노제 진행을 맡아 제례를 올릴 때 언론에 찍힌 사진과 발인 때까지 명동성당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을 맡던 사진들. 그 조차 내 PC에는 없고 기사 검색으로만 볼 수 있을 정도.

그래도 그가 다른 세상에서도 외롭지 않기를. 고문이나 폭력 따위 없는 사랑과 평화가 함께 하기를. 쟁투도 없고 의심도 없고 미움과 증오 따위도 없는 세상이기를. 기도드린다. 선하디 선한 세례명 '쯔가리아', 김근태 형.

<정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