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묵 교수는 지난 번에 이어 강의를 시작했다.
한번 두고난 바둑의 경과를 검토하기 위해 처음 두었던 차례대로 다시 벌여놓은 일을 복기라고 하네.

어릴 때부터 늙은이가 되기까지 한 사람의 평생을 복기할 수 있다면 열 다섯집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시골마을의 어떤 곳을 소개하고 싶어.

오동나무집이라고 불리우는 그곳의 어른을 동네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나온 분이었어.
모두의 생업은 기본이 농사이지만 틈이 날때마다 산에 가서 열매와 약초를 채집, 마을 밖 수량이 풍부한 개천에다 작은 그물을 치거나 어항을 설치해 잡은 민물고기로 반찬을 만들어 먹으며 소박하게 살았네.

관청에서 어려운 글로된 공문이 오면 오동나무집 어른신에게 자문을 구했고 회답을 요구할 경우에는 대필까지 해줬어.
그분은 집안살림을 하는 틈틈이 책을 읽는 선비로 평생을 살았는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중학교를 졸업하자 도시로 뒤쳐나가 온갖 노동일을 하다가 세월이 지난후 월급을 받는 직장으로 들어갔고 혼자 힘으로 결혼한 다음 아내가 임신을 하자 부모님께 맡긴 채 명절이나 큰 제사때 잠깐 다녀갈 뿐 아예 집에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친딸처렴 여기며 예뻐해줬고 아기는 자기가 키워주겠고 마음을 달래주었어. 며느리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고 시어머너의 정성어린 산후조리는 며느리를 감동시켰네.

아이는 탈없이 컸고 세살이 지나면서부터 한번 들은 것은 그대로 외워버리자 할미와 어미는 좋아죽겠다면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자랑하기 바빴지만 할아버지는 근심 걱정이 늘기만 했어.
옛날 어른들이 어릴 때 신동소리를 듣는 걸 자랑하지 말라고 한 것은 깊은 뜻이 있어서일텐데 영리했던 아이가 멍청이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겠나.

할아버지는 학문을 좋아하는 자기가 보기에 사람은 독서를 맣이 해야되고 깊은 사색을 통해 무엇인가를 깨우치고 실천을 해야되는데 외우는 머리만 가지고는 작은 인물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손자가 다섯살이 되자 이웃의 초등학교 3학년 누나가 1,2 학년때 읽던 교과서를 줬는데 금방 한글을 깨우친 다음 전부 외워버렸어.
그러자 할미와 어미가 마을의 집들을 다니며 초등학교 3~6학년 교과서를 빌려왔는데 그것마저 한번 훑어보고는 전부 외워버렸다고 하네.

하루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데리고 마을뒷산 길목에 우뚝솟은 커다란 바위 앞에 가서 말했네.
저 바위는 천만년 비바람을 맞아가며 버티고 있단다.
참을성이 없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불평을 하지 않고서 있을 수 있겠느냐. 작은 재주에 우쭐거리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할아버지 말씀을 다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은데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는 아까와는 다른 눈으로 바위를 보는 것 같았어.
손자는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다 알고 있는 얘기를 하는 선생님 말씀이 지루하기만 했네.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 3년까지의 교과서를 다 외워버렸고 수석으로 입학한 중학교에서는 졸업할때까지 학비를 면제해줬으며 고등학교 역시 장학금으로 졸업, 대학도 수석입학, 수석졸업으로 등록금없이 다녔어.

대학을 졸업한 다음 취직시험에 응시, 본인이 가고싶어하는 이름난 큰 회사에 수석으로 합격하자 남들이 부러워하는 제일 좋은 자리에 배치되었네.
손자는 그 회사에서 3년을 근무하다가 별다른 이유없이 사표를 내고는 그만뒀어.

가족들이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네.
수석합격할 때는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기발한 창의성을 발휘하리라고 기대했던 중역들은 크게 실망했어.

또하나는 직장 동료들과의 따뜻한 인간관계가 없었다는 거야.
밥도 혼자서 먹고 퇴근 후 술좌석에도 어울린 적 없었대.
외톨이로 있다가 3년을 못채우고 집에서 빈둥거릴 때 또 다른 회사의 입사시험에 응시, 수석으로 합격했으나 그 곳에서도 3년 만에 사표를 내자 각 회사의 인사과 책임자들 모임에서 3년짜리 무위도식 수석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찌가 붙었어.

손자가 마지막 회사를 그만둔 다음, 이력서를 받아주던 곳이 없게 되자 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졌네.

세월이 흐른 다음 후즐근한 옷을 걸친 채 땅을 내려다보면서 힘없이 걸어가는 수석합격자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 후에는 그런 말도 들리지 않았대.
윤 교수가 말을 마치자 두 분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