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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비아 사망 사인 北 학대? 버제트 기자가 기록한 딘 장군의 포로생활
2017년 06월 23일 (금) 15:35:43 [조회수 : 1499] 국동근 honamgdk@hanmail.net

유엔 대북제재 국면 속에 남북관계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사드 문제에 봉착한 문재인 정부가 오토 웜비아 사망까지 겹치면서 북미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 분위기와 남북 관계 활로 모색이란 두가지를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게됐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해외순방인 미국 방문과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윔비아 사망과 관련 북한 비난에 가세했다.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만나게 되면 영광' '영리한 지도자'라고 칭찬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잔인한 정권"이라고 비난했다.

웜비어 사태를 계기로 조선의 인권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웜비아가 받았을 각종 탄압과 비인간 학대를 받았을 것이라며 김정은에 살해됐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근거가 없이 북한은 악마라는 편견에 바탕한 추정에 근거한 비난 일색이다.

본지는 이런 가운데 국내는 물론 미국에서조차 공개되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미국 고위장성 포로에 대한 처우를 한국전쟁 당시 호주의 한 언론인이 기록한 다큐멘터리의 존재와 그 내용을 공개한다.

1950년대 조선반도 전쟁 당시 일본 주둔 미군 장성으로 참전한 딘 소장의 포로생활을 다룬 호주 언론인의 다큐멘터리 내용을 통해 북측 인권현실에 대해 독자들의 이해와 판단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근 미국의 교민 커뮤니티에 소개된 내용을 가능한 가감없이 전한다.

물론 이 내용이 전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믿지는 않지만 꽉 막힌 남북관계와 미국은 무조건 선이고 북한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역시 민족분단의 아픈 현실을 극복해야 하는 우리에게 도움되지 않는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자세가 더욱 필요한 때다.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긴다.<편집자주>

호주의 기자 윌프레드 버체트(Wilfred Burchett)가 어떻게 유명한 기자가 되었고 서방으로부터 배척받았는가, 또 그가 어떻게 생의 마지막까지 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는가 하는데 대해 지금도 아이러니한 점이 많다. 그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잘 알려 지지 않은 몇가지 사실을 공개한다.

1. 운명의 기회

버체트는 1950년대초까지만 해도 별로 잘 알려 진 언론인이 아니었다. 물론 진보적 성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우익적이고 서방의 입장에 선 언론인일 따름이다. 그가 극좌적인 성향이 강하다면 1951년 6월부터 진행된 정전담판을 조선전쟁의 유엔군측 호주기자로 취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나 누구도 이것이 버체트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본인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정전담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어느 날 저녁, 취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 온 버체트는 우연히 자기의 군복주머니에 쪽지편지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편지의 내용은 정전담판과는 대비도 안될 토핑뉴스를 취재할 생각이 있으면 어디에 가서 누구를 조용히 만나라는 북한측의 통고였다. 이미 아무 소득이 없는 정전담판취재에 신물이 났던 버체트는 주저없이 취재를 그만두고 출국하어 북한이 지정한 3국에 가서 북한이 파견한 안내원을 비밀리에 만난다.

북한측은 이미전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토핑뉴스감을 공개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동구권에서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미국과 서방이 폄하할 수 있었으므로 서방의 우익언론인들가운데서 진보적 성향이 강한 인물을 고르던 중 버체트가 걸려든 것이다. 북한은 버체트를 충분히 입체적으로 요해한 다음 그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토핑뉴스를 보도할 수 있다고 점 찍었다. 전쟁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토핑뉴스이며 북한의 수가 얼마나 높고 전략적 안목이 깊은가를 보여 주는 사례이다.

북한 안내원을 따라 버체트가 간 곳은 자강도의 어느 한 골안이다.

2. 미 24사 사단장 딘 소장을 만나다

거기에 바로 미군 24사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포로생활을 하는 집이 있었다. 북한은 딘 소장을 포로한 후 일반 병사들과는 달리 따로 격리시킨 후 전문안내요원을 붙여 별장과 같은 곳에서 생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행방불명된 후 거의 10개월이상 북한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어 미국에서도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살아 있고 지어는 아주 건강하고 활기넘친 딘 소장을 직접 취재하게 된 버체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버체트는 며칠동안 그 별장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딘의 기상으로부터 시작하어 조깅, 식사, 카드게임, 독서, 휴식, 수영, 산보, 취침 등 상상을 초월하는 포로생활 전부를 그대로 동영상필름에 담았고 딘과 여러차례 면담하면서 대전작전의 실패와 산속에서 헤메다가 포로될 때까지의 과정, 포로수용소에서 신분확인한 후 격리시켜 잘 대우해 준데 대하어 사실 그대로 취재하었다. 이렇게 되어 나온 다큐가 바로 '딘의 포로생활'이다. 사기가 나서 호주로 돌아 온 버체트는 이 다큐를 미국에서 개봉했다.

이 다큐가 얼마나 미 정계에 대파문을 일으켰는가는 굿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불과 20여분밖에 안되는 하나의 짤막한 이 다큐가 전반적인 전쟁국면에 큰 영향을 주고 일약 버체트를 세계적인 유명언론인으로 만들었다.

3. 딘은 누구인가, 왜 북한이 딘 소장을 버체트에게 공개했는가?

그러면 딘은 어떤 인물이며 북한이 무슨 목적으로 포로된 딘 소장을 버체트를 통해 미국에 공개했는가?

바로 딘은 트루맨 대통령의 매부이다. 다른 말로 트루맨 대통령의 누이 남편이 바로 윌리엄 딘이다. 그러기에 딘은 자기의 직속상관인 워커도 우습게 여긴 것이다.

지금껏 죽은 줄 알았던 자기 남편이 북한에 포로되어 포로생활을 한다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본 딘의 아내는 화가 나서 미 국회에 나타났다. 그녀는 국회의원들을 삿대질하며 자기 남편을 살려 내지 못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소리 쳐 온 국회를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딘의 생사여부가 미국의 체면, 트루맨의 체면과 연관되므로 차라리 죽었다면 모르겠는데 살아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으니 트루맨과 미국회는 그야말로 호미난방이 되었다. 미국 역사상 장성급으로서 적국에 포로된 것은 딘이 유일하다. 급해 맞은 트루맨과 미 국회가 정전담판 유엔군측 대표에게 포로송환문제를 북한의 요구대로 들어 주라고 강압하어 정전담판 유엔군측 대표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북한은 정전담판에서 가장 난제였던 포로송환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 딘 소장 한명을 카드로 하어 수만명의 자기측 포로들을 구출한 것이다.

조선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차마 딘 소장과 관련한 이 모든 사실들을 공개할 수 없었으므로 지금껏 숨겨왔다. 그러나 북한에는 지금도 '딘의 포로생활'이라는 다큐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도 왜 이 다큐를 공개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수 없다.

4. 딘 소장의 포로일화

딘을 포로한 과정은 믿기지 않는 하나의 소셜이다.

조선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1950년 7월 초 김일성 수상은 북한군 전략정찰일꾼들로부터 미국과 유엔의 조선전쟁개입기획에 대한 자료를 받는데 여기에 바로 딘 소장의 개인 인물자료가 있었다.이 자료는 뜻밖에도 일본 도쿄의 미 8군 사령부에서 보내 온 것이다. 딘이 트루맨과 처남매부관계라는데 주의 돌린 김일성 수상은 미 24사와의 전투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조선전쟁의 운명을 판가리하고 특히 정치적인 지렛대로 작용할 수 있는 문제로 간파하고 미 24사를 포위소멸할 기획을 세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어 딘을 포로하려는 기획이다. 그리하어 세계전쟁사에 현대포위전의 전형으로까지 평가받는 대전포위전투가 창조된다.

그러나 여기에 알려 지지 않은 또 다른 작전이 추진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의 목적, 즉 딘을 포로하기 위해 무려 20여 개이상의 북한군 특공대가 대전에 침투한 것이다. 물론 지금의 특공대와 대비가 안 되므로 딘 포로작전은 실패하지만 이러한 특공대들의 검질진 추격에 혼쭐이 난 딘은 혼자서 산속을 거의 한달가량 헤메다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민가에 내려왔다가 포로된다.

포로될 당시 병사복을 입었으므로 북한군 군인들은 그를 알아 보지 못하고 일반 병사포로들과 같이 대우한다. 얼마후 미군포로들의 담화과정에 딘은 자기가 미 24사 사단장 딘 소장이라는것을 실토한다.

원래 딘은 1950년 10월에 공개되어 송환될 수도 있었다. 신천에서 북한의 황해도 위원장 김용진이 미군에 포로되었을 때 북한 지도부가 김용진을 구출하기 위해 구월산 파르티잔을 이용하려고 하었으나 당시 구월산 파르티잔은 내부 알륵이 심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전투를 실제상 할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어 북한에서는 딘 소장과 김용진 위원장을 교환할 기획을 추진하었으나 미군이 김용진을 너무 빨리 사형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전쟁이 끝난 후 포로교환할 때 북한에서는 딘 소장에게는 그의 요구대로 포로번호 24번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잘 알려 지지 않은 하나의 일화이다.

5. 그후의 버체트

북한에 잘 보여 일약 유명기자로 된 버체트는 정전담판취재에 아예 흥미를 잃고 조선전쟁 전기간 북한에 가서 취재한다. 그의 활동으로 하어 미국과 유엔군의 만행자료들이 그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 세계에 공개된다.

호주는 영국과 함께 미국에 추종하어 조선전쟁에 가담한 후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수많이 학살한 주요 장본인인데 저들의 만고죄악이 다름아닌 제나라 언론인에 의해 폭로되니 심기가 좋을리 없었다. 그리하어 미국과 서방, 호주는 버체트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든 것이다. 그 이후의 사실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 졌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가, 누가 인권옹호자이고 누가 인권범죄자인가를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필명 '강산'운 댓글을 통해 "버체트는 참 용감한 기자였군요.  딘의 포로생활에 대해서 우리들은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이 글로 그가 잘 대우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버체트는 또한 북한이 입었던 전쟁의 잔혹함과 엄청난 피해를 서방세계에 널리 알린 공로가 크군요"라고 글을 남겼다.

※ 위 글은 재미 교포의 글이어서 다소 한국어가 서툰 점이 있다. '심지어' 단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가능한 필자의 원문을 살린다는 점에서 그대로 수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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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욱 변호사님,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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