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부패구조 척결을 지시했다. 이 회장은 최근 삼성그룹 감사팀이 방위산업체인 삼성테크윈에 대해 벌인 내부감사 결과를 보고받은 뒤 격노했다.

이 회장은 8일 “삼성의 조직문화가 훼손됐으며, (조직 내부) 부정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질책했다.

이 회장이 훼손과 부정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대놓고 자기비판을 가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삼성은 감사결과 드러난 치부를 외부에 스스로 공개했다. 

최근 삼성을 둘러싼 세계 전자업계의 견제와 검찰 수사 와중에 내부 기강을 다잡기 위한 포석도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이인용 삼성 커뮤니케이션팀장(부사장)은 이날 열린 사장단 회의 직후 이 회장의 발언 내용을 전했다.  

이 회장은 “각 계열사에 대한 감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 같고 대책도 미흡하다”며 “해외의 잘나가던 회사들도 조직의 나태와

부정으로 주저앉은 사례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삼성도 예외가 아니다”라면서 “삼성의 자랑이던 깨끗한 조직문화가 훼손되

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감사를 아무리 잘해도 제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이 회장 발언 직후 삼성테크윈 오창석 사장은 임직원들의 비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 회장은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1993년)는 프랑크푸르트 발언 이후 조직변화를 수시로 주문해왔다. 하지만 조직 ‘훼손’과 ‘부

정’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감사결과가 적잖이 충격적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2월부터 한 달 동안 삼성전자 경영진단팀이 실시한 삼성테크윈에 대한 감사에는 20여명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감

사 결과에 대해 “그동안 내부감사 결과를 공개한 적이 없다”며 공개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번 감사 과정에서 하청업체로부터 금품을 받거나 법인카드를 받아 쓴 임원 및 부장급 직원 10여명의 비위 사실이 적발돼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감사는 삼성테크윈이 정부에 납품한 K9 자주포와 관련됐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지난해 연평도 피폭 당시 K9 자주포가 작동불량을 일으켜 문제를 일으켰다. 또 지난해에는 조향장치가 반대로 작동해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삼성이 이 사고를 계기로 K9 사업부문 전반에 대해 점검 과정에서 임직원들의 비리가 상당수 포착될 만큼 환부가 드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방산업체 관계자는 “K9 자주포는 ‘국산 명품 무기’로 불렸지만 국회에서도 거론될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면서 “커플링이란 부품은 규격에 훨씬 못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삼성테크윈은 새 부품을 개발하기보다는 종전 부품으로

단순 교체해주는 작업으로 문제를 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삼성 관계자는 “K9 자주포와 이 회장 발언은 직접 관계가 없다”며 “이 회장이 화를 낸 것은 일부이긴 하지만 삼성 내부조직이 곪고 병들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질책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부정이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 임직원들이 무감각

해져 있다는 사실이 이번 감사 결과의 핵심”이라며 “잘못을 저질러놓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점을 이 회장이 질타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질책은 최근 옥죄어 오고 있는 해외경쟁업체의 견제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애플이 삼성전자를 미국 법원에 제소하고 일본 도시바와 소니가 연합군으로 나서는 등 환경이 예사롭지 않다.

또 한발 빠르게 미래 정보통신 성장 트렌드를 제시하기 보다는 뒤쫓아 이미테이션만 하고 있다는 현실적 측면도 고려됐다는 관측이다. 

감사결과 보고가 계기가 되긴 했지만 이런 비상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강도 개혁과 임직원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의 질책을 계기로 삼성은 당분간 초긴장 모드로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정권 말 검찰의 사정작업과 맞물려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회장의 지시에 따라 감사 책임자의 직급을 높이고 인력보강을 통해 미래전략실 산하 경영진단팀(팀장 이영호 전무)의 위상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테크윈 감사를 계기로 삼성 내부 전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통상대로 연말 임원인사에 반영해도 될 것을 임기중에 단죄하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