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액의 회삿돈 횡령과 배임혐의로 법정구속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말바꾸기가 도를 넘고 있다.
22일까지 16차례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최 회장의 진술번복이 계속되면서 담당 재판부로부터 이해할 수 없다며 거짓말 같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항소심에서 재판부를 두번이나 바꿔가며 법원을 우롱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22일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문용선)공판에서 최태원(53·구속) 회장은 계열사 펀드 조성과 선지급은 김원홍(52) 씨의 '종용' 때문이었다고 진술을 또 번복했다.

최 회장은 특히 ‘김원홍 씨에게 6,000억원대의 사기를 당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내겠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그러면서 "2005년께부터 2007년까지 재산의 거의 전부를 김원홍 씨에게 투자했다"며 "김 씨로부터 회수하지 못한 돈이 6,000억원 정도"라고 진술했다.

최 회장은 앞선 공판진술에서 "김원홍 씨가 주도한 베넥스 펀드조성은 그룹차원에서 이뤄진 정상적인 투자"라며 김씨를 두둔했었다.  

최 회장은 "1998년 손길승 전 부회장을 통해 김씨를 소개받았다. 김 씨가 주가·환율 미 연준 이자율 등에 관해 정통해 그 덕분에 나도 열린 시야로 경영할 수 있었다"며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2005년부터 선물 투자금 명목으로 김원홍 씨에게 6,000억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최 회장에 따르면 김씨는 2008년 6~8월 추가로 1천억원을 받은 뒤 곧 원금과 이익을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김씨가 약속한 날짜에 투자금을 반환하지 않는 일이 여러차례 생겼고 그때마다 김씨는 시간끌기에 급급했다. 선물투자로 단기간 수십배 (수익을) 낸 기록을 보여주며 몇 달만 더 기다려주면 돌려주겠다. 한 번만 믿어달라고 했다는 것. 

최 회장은 “결국 제가 사기당한 것 외에 남은 것이 없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김씨에게 투자금 반환소송을 내고 사기 혐의로 고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최 회장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인물로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인물이다. 최 회장과 투자의 스승과 제자, 베넥스펀드 운용 책임자였던 펀드매니저가 사기꾼과 피해자 관계로 둔갑한 것이다.  

최 회장이 김씨와의 관계를 공개한 것은 최근 전 헌법재판관 이공현 변호사 변호인으로 교체하면서 막판 재판 전략을 수정한 데 따른 것이란 해석이다.

갑작스런 입장변화와 관련 최 회장은 "김원홍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게 부끄러워 그랬다"는 것이다.

최 회장 측은 앞서 11일에는 김원홍 씨가 최태원 최재원 김준홍 전 대표 등 사건 당사자들의 대화내용이 담긴 녹취파일도 공개했다.

최 부회장측은 대화녹음파일 3개(김원홍-김준홍 녹음파일 2개, 김원홍-최재원 녹음파일 1개)를 제시했다.

대화녹음 파일을 공개하기까지는 최태원 최재원 형제는 잘못이 없고 김준홍 전 대표가 모든 일을 꾸몄다며 김준홍 전 대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정황이 드러나 있다.

녹음된 대화는 '최태원·최재원 형제는 죄가 없고 내가(김원홍 전 고문) 모든 것을 주도했다'고 강조하며 앞으로의 진술전략을 논의하는 내용이었다.

김원홍 전 고문은 녹음파일에서 "최 부회장은 그게(펀드 선지급) 왜 돌아가는지도 몰랐던 것이고 너(김준홍 전 대표)와 나 사이의 일이 이렇게 돼 버린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준홍 전 대표는 이날 법정에서 "총대를 맨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왜 다시 묻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 이유를 알겠다"고 말했다.

김원홍 전 고문은 김준홍 전 대표에게 "대법원에 가면 무죄다. 내가 자료를 다 가지고 있으니 겁먹지 말고 내가 하라는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또 "나에게 보낸 돈은 투자금이 아니라 보험료로 보낸 것"이라고 강요했다.

이에 김준홍 전 대표는 "전화통화를 한 뒤 너무 억울해 '보험료는 말도 안된다 최 회장의 투자금이라고 말했지 않았나. 나에게 덮어씌우려는 것 아니냐'는 내용의 문자를 다음날 아침 보내기도 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김원홍 전 고문과 최 부회장의 대화 녹음파일에는 "너(최 부회장)는 죄가 없는데 미안하다. 내가 누명을 벗겨주겠다. 너는 죄가 없고 최 회장도 진짜 죄가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11일 공판에서 김준홍 피고인으로부터 최 회장이 1심에서 펀드조성을 몰랐다고 했던 것을 뒤집는 진술이 나오자 22일 공판에서 이공현 변호인(법무법인 지평지성)은 "최 회장이 펀드구성을 주도했다"고 말을 바꿨다. 다만 이 변호사는 "선지급된 펀드 돈이 김원홍으로 간 사실을 알았거나 공모한 사실은 없다"고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횡령 배임죄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또 베넥스펀드가 그룹의 전략적 펀드였다는 주장과 김원홍과 최 회장간 녹취록 증거신청도 철회했다. 최 회장 형제 측 변호인들은 '김준홍 전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가 단독으로 횡령을 저질렀고 최 회장 형제는 무죄'라고 주장하기 위해 녹음파일과 녹취록을 탄핵증거로 신청했었다.

김준홍 전 대표는 지난 11일 최 회장이 선지급은 물론 김원홍 전 고문에게 전달된 선지급금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며 처음 공개했다.

김 전 대표는 "2008년 10월 최 회장과 김원홍 전 고문을 함께 만난 자리에서 본 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고 선지급 기한인 10월 말을 언급한 것도 최 회장이었다"고 공개했다.

최 회장은 계열사 펀드 조성과 선지급금에 대해 애초 1심에선 “나는 펀드조성 사실(자체를)을 몰랐다”고 했다가, 항소심에선 “펀드 조성과 선지급은 알았지만 그룹 차원의 정상적인 펀드 추진 과정이었다”고 했고 이후에는 또다시 "김원홍 씨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진술을 뒤집었다. 

SK그룹 계열사 노조의 한 관계자는 "최 회장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재벌그룹 회장이 한탕 대박을 노리다가 수천억을 사기당하는 CEO로서 현격한 결격사유를 드러낸 것을 자인한 꼴로 진작에 CEO자리를 내놨어야 했다"는 점을 자인한 꼴이라며 "형을 피하기 위해 급급한 당당하지 못한 태도에 오너라는 게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2심에서 일부 혐의인정과 진술번복이 감형만을 노린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최 회장은 김씨의 요구로 펀드 조성을 지시했지만 계열사(SK텔레콤, SKC&C) 돈이 김씨에게 송금된 사실은 여전히 몰랐다는 입장이다.

이공헌 변호사는 "2008년 10월 경 김원홍의 종용에 따라 피고인이 펀드구성을 주도했다"며 "하지만 피고인이 선지급된 펀드 돈이 김원홍으로 간 사실을 알았거나 공모한 사실은 없다"고 강조했다.

결국 횡령혐의를 부인하는 것이지만 피고인은 법적 책임이 엄중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고 덧붙여 재판부가 앞서 잘못한 점을 인정하고 반성하면 양형에 참작하겠다고 한 것에 맞춘 발언으로 보였다.

재판부 반응은? "거짓말같다" = 재판부는 펀드 출자의 과정, 경위, 동기 등과 김원홍씨의 관계에 관한 피고인 진술도 거짓말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김원홍이 나올 수 없다는 걸 알고 거짓말하고 있는 것 아니냐, 펀드 선지급 경위를 둘러싼 피고(최태원 회장)와 김원홍의 얘기가 상식적으로 믿기지 않는다"고 반응했다.

재판부는 녹음파일의 녹음 취지와 경위 등에 대해서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며 SK측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다.

재판부는 "변호인이 결정적인 증거인 양 녹음파일을 제출했지만 (최 회장 측이) 김 전 대표에게 본건의 핵심사안인 베넥스 펀드 출자금 선지급과 송금 혐의를 뒤집어쓰게 하려는 정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녹취록이 약인지 독인지 모르겠다"며 "녹취록과 녹음파일 제출을 물러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최 회장측의 재판에 임하는 태도에 신뢰감을 주지 않았다. 재판부가 막판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해 16일 급히 투입한 변호인의 변론 전략이 재판부에 어떤 신뢰감을 줄 지 주목된다. 

앞서 최 회장은 SK텔레콤 등에서 베넥스에 출자한 펀드 선지급금 450여억원을 중간에서 빼돌려 김원홍씨에게 송금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김준홍 전 대표는 최 회장과 범행을 공모한 혐의 등으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최재원 부회장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