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4월20일.

파리 수플로가를 따라 몇 블록에 걸쳐 새하얀 카펫이 판테온 앞까지 깔려있다. '판테온'에는 둥근 돔 천장부터 바닥까지 삼색기(프랑스기)가 늘어뜨려졌고 프랑스의 국가 '마르세예즈'에 맞춰 근위병들이 흰 카펫위를 행진했다. 길가에 선 수천명의 인파는 평소와 달리 고요했다.
퀴리 연구소 교수들의 뒤를 따라 파리지앵고교생들이 파란색, 흰색 붉은색으로 쓰여진 알파벳 문자(알파, 베타, 감마선 상징하는 그리스문자)를 1m 이상 치켜들고 걸어

도착한 판테온의 둥금 돔 천장 아래 단상에는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의 골분 이장 봉헌을 위해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rand) 대통령이 앉아 있었다.
미테랑의 옆에는 마리가 태어난 폴란드의 대통령 레흐 바웬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암과 투병하며 14년간 대통령 재직의 마지막 주를 맞은 그는 마지막이 될 대중연설을 '프랑스의 여성'에게 바치기로 하고 마리 퀴리(마리아 샬로메스클로도프스카)와 남편 피에르의 골분을 판테온에 안치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판테온에는 콩트 드 미라보(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정치인이자 명연설가), 장자크 루소, 빅토르 위고, 볼테르, 장 바티스트 페렝 등 유명한 프랑스인이 안치돼 있다.

미테랑은 "퀴리 부부의 골분을 가장 신성한 사원에 이장하는 것은 단순한 기념행위가 아니다. 과학에 대한 헌신을 프랑스가 공인하는 것이며 봉헌되는 분들의 업적과 인생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을 확인하는 행위"라고 연설했다. 미테랑은 "오늘의 의식은 판테온이 명예로운 역사에 처음 이름을 올린 여성으로 확장된다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미테랑은 "재능과 지적탐구와 공적책임이 남성에게 주어지는 이 사회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한 여성의 투쟁 사례이자 국가적 관심을 사로잡는 또 하나의 상징적 행위"라고 했다. 바웬사는 "퀴리가 폴란드와 프랑스 양국의 애국자"라고 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판테온, 그것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들과 함께하는 봉헌식에 암투병하는 대통령의 마지막 대중연설을 하던 것과 달리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백성들의 착취와 약탈의 희생자를 바라보는 지구 반대편의 한국은 어떤가. 일본군의 침략행위와 위안부에 대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의 역사인식부재와 망언에 항의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위안부 할머니들이 또다시 현해탄을 건넜다.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이 "위안부 문제는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한 모욕적 망언에 대한 항의와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위안부 할머니와는 또다른 근로정신대 할머니들도 일본 미쓰비시와 신일본제철, 후지코시 등 강제징용을 한 3개기업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미쓰비씨를 상대로 국내법원에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24일 1심 1차심리)했고 다음달에는 현해탄을 건너 미스비시중공업 주주총회 및 강제연행 기업3사 책임추궁 총행동을 하러 간다. 

하지만 프랑스와 달리 우리 정부는 할머니들의 눈물겨운 활동에 어떤 지원도 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무성의하다보니 대일청구권 자금을 써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국내기업들도 무관심하다. 

포항제철(현 포스코)는 생색내기에 급급하고, KT 한전, 도로공사 등 수혜기업들은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1965년 한일회담을 강행한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외침을 외면한 채 정신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배상받아야 할 몫을 가로채 사용했다.

일본은 1966년부터 10년간 무상 3억, 유상 2억 등 총 5억달러 규모의 대일청구권자금을 한국에 제공했다.

이중 24%인 1억 1948만 달러가 당시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를 짓는데 사용됐다. 나머지 대일청구권자금의 대부분은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에 사용돼 한국통신(현 KT), 한국전력, 코레일, 도로공사 등 10여개 공기업과 민간기업에 지원됐다.

당시 고 박태준 전 명예회장은 1969년 '농업용'으로 책정된 청구권 자금을 '공업용'으로 용도를 바꿔 포항제철 건립에 쓸 수 있도록 한국은 물론 일본 정.재계를 찾아다녔다. 재계 관계자는 "이 돈이 없으면 포항제철을 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일부 청구권자금은 일부 친일 보수언론으로 지적받고 있는 한 국내 보수언론의 사옥 건축자금으로도 사용됐다는 얘기도 있다.

위안부 할머니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겐 아무것도 돌아온 게 없다. 일본과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주장하고 우리 정부는 한일관계를 위해 침묵하고 있다.
포스코는 글로벌 회사를 지향한다며 포항제철이란 사명을 버리고 포스코란 이름을 택한 것도 과거를 잊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들은 "포스코가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설립된 만큼 일제강제동원피해자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포항제철 창업자인 고 박태준 전 회장이 2011년 12월 사망하던 당일 정신대 할머니들의 가슴은 미어졌다. 일본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의 살과 피로 지어진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던 이가 떠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계에서 박 전 명예회장을 추모할 때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는 정신대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 1명이 숨을 거뒀다.
김요지 할머니가 박 전 명예회장과 같은 날 사회의 무관심속에 쓸쓸히 눈을 감았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14일 박태준 회장을 애도하며 "산업화의 기틀을 다진 고인의 공적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전제한 뒤 "다만 남다른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제 피해자 문제와 관련해 역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포스코에 한일협정에 의해 일본정부로부터 받은 5억불(무상3억·유상 2억) 중 23%인 1억1948만 달러가 투입됐지만 민족기업이라는 포스코는 피해자들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며 포스코의 무성의를 비판했다.

실제로 강제동원돼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사망한 피해자와 유족은 1995년 7월 일본법원에 신일본제철과 일본정부를 상대로 유골반환과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해 97년 9월 추모제 협력과 1000만원 지원, 희생자 1명당 200만엔 위로금 지급에 합의하고 소를 취하했다.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들은 국내에서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1,2심에서 패소했다.

2005년 5월 피해자 150여명은 포스코를 상대로 한국법원에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포스코를 설립하는 바람에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며 포스코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냈다가 패소해 억울함을 달래지 못하고 있다.

서울고등법원은 2009년 2월 "포스코가 적벌절차에 따라 청구권 자금 중 일부를 받아 설립됐고 이를 상환해 법적 책임을 지우긴 어렵다"면서도 "설립경위와 기업의 사회 윤리적 책임 등에 비춰볼때 강제징용, 임금 미지급 등의 피해를 본 사람이나 그 유족들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그들조차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해서라곤 한 일이 없다.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도 외면하고 있다.

포스코는 "정부차원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재단이 만들어지면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포스코는 강제동원지원재단이 설립되면 사회공헌 기금으로 2014년까지 100억원을 내겠다는 입장이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하시모토 망언에 항의해 현해탄을 건넌 지금도 정부 눈치만 살피며 손을 놓고 있다.

정부의 정신대 강제징용 피해자 자원를 위한 재단설립 등은 더디기만하고 아무것도 진행된 게 없다.

한일청구권협상 이후 48년, 해방된지 68년이 지나면서 피해자들은 상당수가 사망했고 유족들도 고령이어서 하루가 급하지만 정부는 느긋하다.

포스코나 KT 한국전력, 도로공사 등 청구권자금 수혜기업들은 전범기업 미쓰비시사와 다르지 않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일등 전범기업인 미쯔비시사로 끌려간 어린소녀들이 10만명이나 되었다니 일본이, 아니 미쯔비시와 신일본제철, 사가 한국의 어린 소녀들을 얼마나 학대했고, 그들이 세계기업으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밑바닥엔 한국에 있었던 이젠 80대를 맞고 있는 그 어린 소녀들의 피땀의 댓가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들에게 최근에 99엔(한화로 약 1,250원)을 주라고 했으니, 한국인인 우리가 분통 터뜨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홈페이지에 울분을 토하고 있다.

13-16세의 어린 나이에 공부시켜준다는 꾐에 속아 일본으로 갔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해방 된 뒤엔 노동의 댓가를 한푼도 받지 못하고 한국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제 80대에 접어든 할머니들의 피와 땀, 죽음의 댓가인 청구권자금으로 성장한 기업들이 모르쇠하고 있는 것과 미쓰비시가 청구권이 없다고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포스코의 100억 출연계획도 2014년까지인데다 피해자들의 요구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시민단체와 피해자측은 "포스코의 신화는 대일청구권이 아니었으면 결코 없었을 것"이라며 "해마다 수십조의 매출과 수조원의 이익을 내며 해마다 수천억원씩 해외주주들에게 이익배당을 주면서 100억원을 출연하겠다는 것은 생색내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는 "100억원 출연이 아닌 기업이익의 환원차원에서 매출의 1%를 출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피해자 유족들은 포스코가 한다해도 생색내기 차원이 아닌 민족기업으로 제대로 할 때 다른 청구권을 사용한 KT나 한국전력 등 공기업들과 일본 전범기업들의 참여도 압박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